선교활동 > 극동방송 > 중보기도, 어떻게 할까요?
선교활동
· 극동방송
· cts기독교방송
· 국내선교
· 국외선교
· 선교자료실
· 선교사방
 
 
   Home > 선교활동 > 극동방송 
극동방송
 
작성일 : 13-09-25 16:01
중보기도, 어떻게 할까요?
   본문성경구절 : (엡3:14-19)
Date : 2013-09-25 16:01:18  
중보기도, 어떻게 할까요? (엡3:14-19) ♬29, 80. 찬미1193 초원031-386-6656
시인 타고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서두르고, 영리한 사람은 기다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정원으로 간다.”고
합니다. 타고르가 말하는 현명한 사람만이 정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꽃을 찾는 사람도 정원으로 가고, 벌과 나비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정원으로 갑니다. 생명이 춤추고 진정한 쉼과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갑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많이 달라집니다. 유치원 어린이는 부모를 천하제일의 존재로 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엄마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하고 저울질 하지요. 중학생이 되면 부모를 무시하고 ‘내 인생 내가 산다.’는 식으로 반항하다가 고등학교에 가면 부모보다 자기가 잘 났다고 고집 피웁니다. 그러다 50대가 돼서야 부모님의 가치를 절감하면서 효도하려 하지요. 하지만 그 때는 효도 받을 부모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효도하고 싶어도 효도할 대상이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본문의 주인공 바울이 성도 개인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던 일을 끝내고(엡1:15-23), 이제는 시선을 돌려 교회 전체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시각의 변화가 왔습니다. 바울의 중보기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 바울의 기도대상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엡 3:14)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드린다.’ 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늘의 천사(영적 존재)에게는 물론 땅에 사는 인간(육적 존재)에게도 기도 받는 분이시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입니다. ‘아버지’란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마6:9 ; 요17장)을 바울이 자기 삶에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인간이 하나님을「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처녀가 낯모르는 아저씨에게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우연’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과정으로 한 남성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이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아버지’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요20:2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의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는 자칫 금송아지에게 기도할 수 있고(왕상12:28), 바알에게(왕하1:2) 또는 몰록에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왕상11:7).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입니다. 베드로역시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고 외쳤습니다. 오직예수! ♬80천지에 있는 이름
2. 바울의 기도자세는 어떠했나?
(엡 3:15)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매우 간곡한 자세입니다(눅22:41 ; 행7:60 ; 20:36 ; 21:5). 유대인의 기도자세는 이 외에도 서서 드리는 자세(막11:25 ; 눅18:11)와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스10:1 ; 눅18:13) 등이 있습니다.
전북 익산에 사는 제 친구 이항래 장로님의 발가락에는 옹이가 박혔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무릎 꿇고 기도한 흔적입니다. 영광스런 흔적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박수치면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피가 났습니다. 그러다 굳어지고 군살이 되어 이젠 더 이상 찢어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손바닥 전체에 옹이가 박혀 가죽처럼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크게 또, 아무리 오랫동안 박수쳐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자세는 별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아버지 앞에 기도드렸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종종 마라톤에 비유됩니다.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결승점까지 달려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내가 쉬는 동안에도 경쟁자들은 계속 달립니다. 내가 넘어지면 다른 사람들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집니다. 그러나 인생은 마라톤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서는 1등이 딱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라톤에서는 기록이 가장 빠른 사람만 1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는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습니다(김영식의 10미터만 더 뛰어봐). 기도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1등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1등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조금 뒤쳐져 달리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1등입니다. 지금은 꼴찌로 달려도 세상의 흐름이 바뀌면 꼴찌가 1등이 됩니다. 이것이 인생과 마라톤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응답의 끝이 옵니다.
3. 바울은 뭐라 기도했나?
바울은 성도 개인의 영적 성숙을 위하여 중보 기도했었습니다(엡1:15-23). 본문에서는 성도들 전체 곧 범 교회적 차원으로 중보의 폭을 넓혔습니다. 바울이 중보 기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간구했습니다(16)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영광은 풍성합니다. 그 풍성한 영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 있게 하십니다. 바울은 겉 사람보다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소망하고 중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겉 사람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겉 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더 노력하지 않는지요?
 
저는 하루에 10km 이상 달리고 3km 정도 걷습니다. 턱걸이 12회, 팔굽혀펴기 40-50회, 역기 60kg 15회, 평행봉 12회, 음식은 거의 채식이며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합니다. 야채나 과일을 선호하고 커피나 탄산음료는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대략 이런 식으로 겉 사람의 건강을 관리합니다.
그렇다면 속사람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운동할 때나 길 갈 때 MP3로 성경을 듣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쓰기 등을 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소망합니다. 극동방송 설교 쓰고, CTS TV 방송 강의안 제작하고, 신천지에 반론을 제기할 책을 집필하고, 네팔 성토신학교 교재를 만들다보면 TV앞에 앉아 있을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외형을 중시하는 형식이 아닌지 자책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날마다 회개거리로 다가옵니다. 찬미1193-2절 바울처럼
 
2)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간구했습니다(17)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내주하심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사항입니다(요14:20).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묘사했습니다(고전6:19). 그런데도 바울이 성령의 내주를 간구했습니다. 왜죠?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이 내주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내주 하시지만 더욱 강한 역사로 믿음이 견고해지기를 바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3) 성도들이 사랑으로 굳게 서기를 간구했습니다(17).
바울은 그리스도의 내주를 간구했는데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기에 내주하심을 원할까요? (엡 3:17)...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즉, 성도들이 사랑가운데 깊이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식물(뿌리)과 건물(터)을 예로 들면서 성도들이 바람직한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수까지도 포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의 삶의 근본이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엡4:2 ; 요일4:7-11).
 
4) 하나님의 절대사랑에 이르기를 간구했습니다(18,19).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성도가 하나님의 절대사랑에 이르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도가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교리나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나님의 절대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 사고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체험해야만 가능하게 됩니다(고전8:1 ; 13:2 ; 빌4:7).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시어 우리 삶의 현장에 계시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절대 사랑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온 유대는 물론 이방인까지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요3:16).
· 길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묶고도 남을 수 있을 만큼 깁니다. 한계가 없습니다(민11:23).
· 깊이는? 가장 타락하고 밑바닥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미칠 정도로 깊습니다(사59:1).
· 높이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하늘의 천사보다 높게 올릴 정도로 높습니다(벧전5:6).
바울은 우리가 이런 사랑에 이르기를 중보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중보인지 아시겠죠?
 
한 목사님께서 당뇨병 환우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뭔가 사가지고 가야겠는데 당뇨인지라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 서리태를 튀겨가기로 하고 콩을 샀습니다. 그러나 뻥튀기는 장수를 만나지 못한 채 약속시간이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냥 들고 갔다가 심방을 마치고 주변을 뒤져 튀겨가지고 다시 찾았습니다. 그 사이에 자녀들이 퇴근하고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사님을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들을 위하여 바울처럼 중보 기도했을까요?
 
바울의 기도의 대상은 늙은 고목이나 커다란 바위나 볼품사나운 성황당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던 것입니다.
뭐라 빌었습니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간구했습니다(16).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도록 간구했습니다(17). 성도들이 사랑으로 굳게 서기를 간구했습니다(17). 성도들이 하나님의 절대사랑에 이르기를 간구했습니다(18,19). 자기보다 남을 위하여 중보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는 자기 부인에부터 시작됩니다. 중보기도, 어떻게 할까요? 그것은 자기 부인 없이는 중보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중보하지 못합니다(마16:24).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디오피아 속담에 ‘거미줄도 합치면 사자를 묶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미도 모이면 맷돌을 들고, 모기가 모이면 뇌성소리를 낸다지요. 그래서 우리는 중보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 삶에서 한 사람이 큰 역량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모임’에 있습니다. 1이라는 숫자에 100을 제곱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3에 100을 제곱하면 천문학적 숫자가 됩니다. 가정, 직장, 교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동역 자들의 아름다운 동행이 있어 든든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간절한 기도의 세 겹줄이 있으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해야 합니다.
 

 
   
 

 
안양초원교회소개   |   찾아오시는길   |   개인정보취급방침   |   사이트맵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안동 898-2 대림상가 3층| 안양초원교회 | 담임목사 : 안명복 | 전화 : 031-381-6656
E-mail : myungbok3927@hanmail.net
Copyright chowonch.kr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HAZONE.